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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한 의문

최초의 인류는 왜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을까?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2:25)

 

사람이 벌거벗고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만약 벌거벗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미숙한 어린 아이이거나 미친 사람일 것이다. 그도 아니면 전위예술을 하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사람이 벌거벗고서 부끄러워하지 않는 일은 비정상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비정상적인 일이 에덴동산에서 최초의 인류에게 일어났다. 아담과 그의 아내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미숙했다고 해석하기도 하며 선악과를 따먹기 전이었기 때문에 죄의식이 들지 않아서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3:7)

 

그런데 아담과 그의 아내는 선악과를 따먹고 눈이 밝아서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전에는 벗은 줄을 몰랐다는 말이 아닌가? 이는 미숙해서 벗은 줄을 몰랐다는 말도 아니고, 죄의식이 없어서도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벌거벗은 사람이 자신이 벌거벗은 줄을 모를 수가 있는가?

 

사람은 점()을 본다. 눈앞에 물체가 있어도 초점이 멀리 있으면 눈앞의 물체는 보이지 않는다. 즉 아담과 그의 아내는 관심이 외모에 있지 않고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눈앞의 물체인 육체는 보이지 않았다. 다시 말해 아담과 그의 아내는 서로의 육체를 본 것이 아니라 그 속의 중심을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아담과 그의 아내는 벌거벗은 것을 알 수 없었고, 우리의 상식과는 반대로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논증이 맞는지 지금부터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자.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알리기 위해 직접 계시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보이는 게 전부인 인간이 알 수 있도록 가시적 결과를 기준으로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즉 육적 사실은 육적 사실 그대로 기록하지만 영적 사실도 영적 사실로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육적 사실로 기록하고 있다. 영은 시공을 초월하기 때문에 인간에게 영을 직접 설명할 수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을 육적으로 기록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13장의 천국 비유는 가장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천국에서 오셨기 때문에 영을 직접적으로 아시지만 사람들은 영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시공을 초월하는 영적 세계인 천국을 육적이고 실제적인 비유로 설명하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선악과 사건을 말씀에 불순종한 결과로서의 타락으로만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한 구체적 결과는 단 하나 시각(視覺)의 변화다.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던 사람이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는 눈이 밝아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해 입었다. 하지만 어떻게 선악과를 따먹고 눈이 밝을 수 있는가?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된다는 뱀의 말이 맞는 것 아닌가?

 

성경이 육을 기준으로 쓰였다면 눈이 밝았다는 것도 육적 눈이 밝은 것이다. 그렇다면 그전에는 아담과 그의 아내가 육적 눈이 어두웠다는 말이 된다. 즉 선악과 사건 전에는 육적 눈이 어두운 상태, 반대로 말하면 영적 눈이 밝은 상태였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선악과를 따먹고 인간의 시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선악과를 따먹기 전 인간은 영적 눈이 밝아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먹은 다음에는 육적 눈이 밝아 벗은 줄을 알게 돼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해 입은 것이다. 이를 사무엘상 167절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삼상 16:7)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 즉 원죄(原罪) 이후 사람은 외모밖에 못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는 말씀이다. 이렇듯 하나님과 사람은 시각이 정반대이다. 그러니까 아담과 그의 아내도 선악과 사건 이전에는 중심을 보았기에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선악과 사건 이후로 육적 눈이 밝은 모든 인류는 외모밖에 보지 못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해 입는 신세가 된 것이다. 그런데 육신을 입은 사람으로 태어나서 중심을 보는 사람이 딱 하나 있다. 바로 예수님이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2:5~9)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다고 하시니까 어떤 서기관들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하나님 외에 누가 감히 죄를 사할 수 있냐며 신성모독이라고 속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의 속생각을 중심으로 아신다. 즉 그들의 속마음을 보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바로 사람은 외모를 보고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는 말씀처럼 예수님은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외모밖에 못 보던 사람이 예수님처럼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다시 중심을 볼 수 있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선악과 사건으로 타락하기 전 중심을 볼 수 있었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구원이다.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한다.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3:1~3)

 

즉 사람이 구원받고 거듭나면 시공을 초월한 영적 세계인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게 시각이 바뀐다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거듭나면 영적 눈이 떠서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거듭나기 전에는 육적 눈만 밝아서, 즉 영적 눈이 어두워서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직 거듭나는 길 외에는, 즉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고는 영적 눈이 뜰 수 없다.

 

이제 아담과 그의 아내가 왜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는지 정리하고자 한다. 아담과 그의 아내는 원래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중심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선악과 사건 이후 육적 눈이 밝아 외모밖에 못 보는 사람으로 타락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것은 외모밖에 보지 못하던 사람이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다시 중심을 보는 사람으로 바뀌어 하나님의 나라를 실제로 바라보는 것이다. 주만 바라볼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