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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한 의문

선악과를 먹으면 왜 죽을까?

어려서부터 든 의문이 있었다. 선악과를 먹으면 왜 죽을까? 선악을 아는 것은 좋은 건데 왜 죽는 걸까? 이제부터 그 의문을 풀어보려 한다. 선악과를 먹으면 왜 죽는지 알려면 선악과가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한다. 말 그대로 선악과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다. 선과 악을 분별하는 능력은 인간에게 가장 절대적인 요소이다. 선악을 분별해야지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면 그것보다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선을 악으로 알고, 악을 선으로 안다면 세상은 엉망진창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2:7)

 

창세기 27절에 보면 하나님은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다. 바로 사람 창조의 설계도다. 즉 사람은 땅의 흙과 생기로 구성되어 있다. 다시 말해 사람은 처음부터 땅의 흙이란 한 요소와 생기라는 다른 요소, 이렇게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된 이중체이다. 여기서 흙은 우리 인간의 육체를, 생기는 영을 나타낸다는 것은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육체 속에 영이 들어있는 육체우선 이중체로 창조하신 것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완성이 아니다. 창세기 29절을 보자.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2:9)

 

하나님이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거기에 사람을 두셨는데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다. 이는 창세기 27절의 사람으로는 온전하지 못하고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부터 먹어야 한다는 뜻이다. 즉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부터 먹어야 인간이 인간으로서 완성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것은 나무가 아니라 열매일 텐데 성경은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라고 한다. 나무가 보기에 좋을 수는 있겠으나 먹기에 좋을 수 있는가? 우리는 열매를 먹는 것이지 나무를 먹는 게 아니다. 창세기 217절을 봐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셨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지 말라고 하시지 않았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2:16,17)

 

그렇다면 왜 성경은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라고 했을까? 이는 예수님이 마태복음 7장에 산상복음의 결론을 내리시면서 하신 말씀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7:17,18)

 

즉 나무와 열매의 관계를 생각할 때 나무는 열매의 원인이고 열매는 나무의 결과가 된다. 다시 말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원인에서 선악을 분별하는 것이고, 선악과는 결과에서 선악을 분별하는 게 된다. 그렇다면 원인에서 선악을 분별하는 것과 결과에서 선악을 분별하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사무엘상 16장에 보면 하나님이 사울을 버리시고 다윗을 택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사무엘이 다윗의 집을 찾아가 그 형들을 보고 용모와 키가 대단하다며 감탄한다. 하지만 이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판단기준을 제시하신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16:7)

 

즉 사람은 판단기준이 외모에 있지만 하나님의 판단기준은 중심에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사람은 가시적 결과가 모든 가치의 척도인데 비해 하나님은 오직 중심, 마음, 심령만을 보시고 판단하신다는 뜻이다. 이를 선악과에 대입하면 인간은 선악을 분별할 때 결과를 보고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선악을 분별하실 때 원인을 보고 판단하신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창세기 29절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부터는 반드시 먹어야 한다. 그래야 원인을 기준으로 선악을 분별할 수 있다. 이는 사람의 원인인 중심, 마음, 심령을 알 수 있는 생명의 길이다. 하지만 217절의 선악과는 먹으면 반드시 죽게 된다. 결과를 보고 선악을 분별하는 일은 외모를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요, 육신만을 생각하는 사망의 길이요, 이는 결국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길이기 때문이다. 로마서 8장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8:5~8)

 

그렇다면 우리를 하나님과 원수로 만들어 사망으로 인도하는 육신의 생각에는 것들이 있을까? 창세기 36절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창 3:6)

 

첫째, 먹음직이다. 둘째 보암직이다. 셋째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다는 것이다. 여기서 먹음직은 물질욕을 뜻한다. 보암직은 명예욕이다. 마지막으로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것은 솔로몬이 이스라엘 백성을 통치하기 위해 지혜를 구했던 것과 같이 지배욕을 뜻한다. 이렇게 돈, 명예, 권력은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가치의 총합이다. 그래서 선악과는 단지 금단의 열매가 아니라 인간이 세상에서 육신으로 추구하는 모든 가치다. 그래서 마태/누가복음에서 사단이 예수님을 선악과로 시험했다. 돌을 떡으로 만들라(물질욕),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라(명예욕), 내게 절하면 천하만국을 다스릴 권세를 주겠다(지배욕)며 사단이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넘어뜨리려 했다. 다만 아담은 선악과를 먹었고, 예수님은 선악과를 먹지 않았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해도 가시적 결과가 절대이다. 그 아무도 원인에서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영과 육으로 구성됐으되 육체우선 이중체로 설계된 사람은 누구나 외모만을 보고 사람을 판단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요구는 외모를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안식일에 병자를 고쳤다고 공격하는 유대인들에게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7:24)고 말씀하신 것이다. 오직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만 인간은 결과가 아닌 원인에서 선악을 판단할 수 있다.

 

선악과를 먹으면 왜 죽을까? 선악을 분별하되 결과에서 분별하는 것은 죽음의 길이다. 지금 당장은 돈, 명예, 권력이 대단한 것 같아도 선악과를 추구하는 삶은 자신을 하나님과 원수로 만들어, 끝내 스스로 자신의 영을 죽이고 만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믿고 육체의 소욕을 부인하는 것만이 사는 길이요 생명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