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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한 의문

복음서는 왜 네 권일까? - 예수의 이중사역과 점진적 계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성경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 기준이자 잣대다. 우리의 신앙과 신학은 성경이 제시하는 기준과 잣대에 어긋나면 그 누가 주장하는 경험과 이론일지라도 철저하게 배격해야 한다. 또한 아무리 세상 사람들이 다 맞다 하는 말일지라도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에게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허언일 뿐이다. 하지만 막상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는 많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여기저기 모순되는 구절이 한두 가지가 아니고, 반복적으로 언급되지만 내용이 다르기까지 하다. 그 중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기록한 복음서가 네 권이나 된다는 사실이다.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기록하는데 왜 네 권의 복음서가 필요할까? 심지어 네 복음서에서 같은 사건을 기록할 때도 그 내용이 같지가 않다. 이를 단지 각 복음서 저자의 신학적 차이로만 설명가능한 일일까? 그래서 하나의 신학이 아니라 여러 신학이 공존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식으로 얼버무리면 이 엄청난 모순을 해결할 수 있을까?

 

기존의 성서신학은 마가복음이 기원후 70년 이후 쓰여 복음서라는 양식이 탄생했으며 이후 마가복음을 모본으로 각각의 자료와 예수의 어록이라 불리는 Q자료(Quelle/크벨레: 독일어로 자료라는 뜻)가 활용돼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쓰였다고 본다. 요한복음은 그 성격상 헬라철학의 이원론에 영향을 받아 로고스 기독론을 바탕으로 쓰인 별도의 복음서라 판단하는 게 성서신학의 내용이다.

 

우선 왜 이런 신학이 성립했는지부터 살펴보자. 기원후 70년은 유대인의 반란으로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연도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울이 로마로 선교여행을 떠나기까지 그리스도인도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린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기원후 70년 전까지는 기독교 신앙의 구심점도 성전이었다는 것이 신학자들의 판단이다. 그런데 로마가 유대인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자 새로운 신앙의 구심점이 필요했고, 그때부터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기록한 복음서가 기록됐다는 것이다. 그 증거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성전파괴를 예언한 점을 들고 있다. 즉 성서학자들의 판단은 예수님의 성전파괴예언이 공생애 때 예수가 실제로 성전파괴를 예언한 것이 아니라 복음서를 기록하는 과정에서 예수가 성전파괴를 예언한 것처럼 창작한 문학적 장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전파괴예언 본문은 복음서 저자가 성전이 파괴된 이후 예수님이 성전파괴를 예언한 것처럼 지어내 삽입했다는 것이 성서신학의 설명이다.

 

성경에서 네 복음서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순서대로 배치돼 있다. 성경을 일점일획도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면 이 복음서의 배치도 우연히 이뤄진 인간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배열된 분명한 이유가 있는 순서일 것이다. 기존의 성서신학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공관복음서(共觀福音書)라 해서 같은 시각으로 쓰인 복음서라 명명한다. 그 증거로 세 복음서에는 같은 사건이 많이 나오고 갈릴리에서 시작돼 유대를 거쳐 예루살렘에서 마무리되는 서사구조가 같다는 점을 들고 있다. 게다가 마가복음이 가장 압축적으로 예수의 생애를 보여줄뿐더러 가장 오리지널한 복음서의 양식이기 때문에 <마가 마태 누가의 예수 이야기>라고 제목을 붙인 공관복음서 해설서도 출판된 게 신학계의 실상이다. 하지만 복음서의 집필이나 배열도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대로 이뤄졌다면 현재 성서신학에서 말하는 복음서에 관한 갖가지 이론들이 인간적 방법에 의한 인간적 주장일 뿐이라는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성서신학에선 예수 그리스도를 역사적 예수라고 하여 네 복음서를 통해 실제 예수님의 생애가 어땠는지 재구성해보려는 신학적 연구가 있다. 이런 역사적 예수연구는 네 복음서에는 같은 사건을 기록하더라도 서로 다른 내용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에 실제 예수님은 어떤 사건을 어떻게 하셨는지 역사적 사실로 밝혀보자는 취지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역사적 예수를 연구한 신학자들의 결론은 실제 예수의 생애는 재구성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 복음서가 네 권이나 되고, 거기에 수많은 예수의 말씀과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데도 역사적 예수는 재구성될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를 게 됐을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육체가 하나님인 단일체로 생각한다. 그래서 성자의 귀한 몸이 십자가가 달려 보혈을 흘림으로써 전 인류의 죄를 사했고, 우리는 그 은혜를 믿으면 영혼구원을 받고 천국에 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마리아가 잉태한 예수라는 인간 속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성령으로 내주한 육체우선 이중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을 완전한 하나님이면서 완전한 사람으로 고백하면서 단일체로 파악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로마서에서도 예수님을 육신과 영으로 나누어 이중체로 계시하고 있다.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1:3,4)

 

예수님이 단일체가 아니라 이중체라는 점은 성경해석, 나아가 복음서 해석에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다. ‘역사적 예수연구가 실패로 끝난 까닭도 예수님을 단일체로 보고 겉껍데기인 육체가 실제로 어떤 모습이었는지 어떤 일을 했는지 규명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성령으로 내주해 계신 육체우선 이중체이기 때문에 육체를 위해 사역하실 때와 영혼을 위해 사역하실 때가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예수님은 육과 영의 이중체로서 이중사역을 하셨기 때문에 단일체의 단일사역으로 예수님을 파악하려고 하면 그 전모가 드러날 수 없는 것이다.

 

복음서는 왜 네 권일까? 예수님이 단일체고 단일사역을 하셨다면 복음서는 온통 모순 덩이리다. 같은 사건이 각 권마다 다르게 기록되어 있고, 요한복음은 아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 모순을 해결해 보려고 마가복음이 먼저 기록되고, 마태 누가복음이 마가복음을 보면서 다른 자료들을 더해 각각 만들어졌으며,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와는 다른 헬라철학의 이원론을 바탕으로 쓰인 제4복음서가 된다고 본다. 하지만 예수님이 이중체이고 이중사역을 하셨다면 복음서 기록도 육신을 위한 사역을 하실 때와 영혼을 위한 사역을 하실 때가 다를 수밖에 없다.

 

대표적으로 마태 마가 누가복음서에서는 변화산 사건을 기점으로 그 전에는 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쫓고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표적과 기사를 중점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와 달리 변화산 사건 이후로는 여러 가지 말씀으로 신학정립을 해주시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다시 말해 마태 마가복음은 변화산 이전 분량이 변화산 이후 분량보다 더 길다. 마태는 전체 28장 중 17장에 변화산 사건이 있고, 마가는 전체 16장 중 9장에 있다. 이는 마태 마가복음은 변화산 이전의 육신을 위한 사역으로서 표적과 기사가 주된 내용을 차지하는 복음서라 할 수 있다. 또 누가복음은 변화산 이후 분량이 변화산 이전 분량보다 더 길다. 전체 24장 중 9장에 변화산 사건이 있다. 이는 누가복음은 영혼을 위한 사역으로서 신학정립이 주된 내용을 차지하는 복음서라 볼 수 있다.

 

이어 요한복음은 영적 복음서이기 때문에 아예 변화산 사건 이후의 신학정립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로고스 기독론부터 시작하고 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과는 서사구조가 다르고, 그 안에 기록된 7가지 표적도 세 복음서와는 달리 예수님의 정체성을 밝히기 위해 선별되어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20:30,31)

 

그러니까 네 복음서는 중구난방으로 기록돼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지금의 성경에 들어오게 된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네 복음서는 하나님의 철저한 계획과 섭리 하에 기록됐을 뿐만 아니라 성경의 계시방법인 점진적 계시로 신학적 순서에 따라 배열되어 있는 것이다.

 

성경은 일점일획도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물며 우리의 구원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기록한 네 복음서가 인간이 창작한 문학작품일 수가 있겠는가? 최근에는 이집트 나그함마디에서 발견된 영지주의자의 외경이 마치 진짜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한 문서인 양 미혹하는 학자도 있다. 하지만 우리의 신앙과 신학의 유일한 기준과 잣대는 오직 성경밖에 없다. 그 가운데 네 복음서는 우리의 신앙과 신학에 절대적이고도 절대적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단일체 단일사역의 육적 메시아가 아니라 이중체 이중사역의 영적 메시아로 다시 정립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