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처럼 어려운 책이 있을까? 아무리 욥기를 읽어도 대체 욥의 잘못이 뭔지 알 수 없다. 기독교에서는 지혜서로 분류되는 욥기가 왜 지혜서인지도 잘 모르겠고,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란 고백도 느낌은 오지만 뭔가 확실한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욥기를 살펴보고자 한다. 욥은 전통적으로 신정론(神正論:신은 악이나 화를 좋은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쓰고 있으므로 신은 바르고 의로운 것이라는 이론) 차원에서 논의가 이뤄져 왔다. 하지만 바로 이 신정론에서 벗어난 것이 욥기이기에 해석이 어려웠던 것이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욥은 의인이란 점이다. 그것도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인이다. 대체 이런 의인에게 하나님은 왜 고난을 주시는 걸까? 사단이 격동해서? 그렇다면 욥기 후반부에 여호와의 등장과 그의 일장 연설, 그리고 욥의 회개는 말이 되지 않는다.
의인의 까닭 없는 고난. 이는 욥기를 해석하는데 가장 까다로운 지점이다. 하지만 욥기의 구성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욥의 정체를 알 수 있다. 욥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의인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단을 통해 고난을 내리셔도 어리석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는다. 하루아침에 전 재산을 잃고 자식을 모두 잃어도 그는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을지어다 하며 하나님을 경배한다. 심지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악창이 났어도 그는 어리석게 하나님을 욕하지 않는다. 비록 그의 아내조차 그를 조롱하더라도 말이다.
그런데 사달은 욥의 세 친구들이 나타나면서부터 일어난다. 욥이 자기 생일을 저주하기 시작한다. 차라리 엄마 뱃속에서 죽어서 태어나지 않았던 게 나았다며 고통을 호소한다. 여기서 친구들은 욥의 원망이 혹독하다며 그를 나무란다. 그런 친구들의 구박에 욥은 너희가 내 분함을 알겠냐며 항의한다. 결국 기나긴 세 친구들과 욥의 언쟁이 이어지는데 세 친구들은 욥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고난을 받는다는 인과응보(因果應報)를 내세우고, 욥은 아무 죄가 없는데 하나님이 자신에게 고난을 주셨다면서 자기 의를 주장한다.
이들의 논쟁을 마무리 하는 자는 엘리후다. 엘리후는 이들보다 자신이 어려서 말을 아꼈지만 세 친구들이 욥을 제어하지 못하는 데에 화가 났고, 욥에게는 자기가 하나님보다 의롭다고 한다며 화가 났다고 한다. 그러면서 눈에 들어왔던 구절은 바로 이것이다. 엘리후가 욥을 야단치는 말이다.
내가 그대에게 대답하리라 이 말에 그대가 의롭지 못하니 하나님은 사람보다 크심이니라 (욥 33:12)
욥은 자기가 의롭다고 하는데 엘리후는 욥이 의롭지 않다고 한다. 이유는 하나님이 사람보다 크기 때문이다. 여기서 크다는 말은 능력이 크시다는 말이다. 여태껏 욥에게 죄가 있느냐 없느냐, 욥이 의인이냐 죄인이냐 논쟁하다가 갑자기 왜 능력을 말할까? 이는 엘리후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연설에서도 드러나는 주제다. 바로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계속 강조하면서 인간의 한계, 욥의 무지(無知)를 질타하는 것이다. 그래서 욥기 전반에 걸쳐 전능자(全能者)라는 하나님의 호칭이 자꾸 강조된다. 게다가 의냐 불의냐 선이냐 악이냐는 무엇으로 결정되는가? 아니 욥의 의라는 것이 무엇이었나?
결국 욥의 의란 종교적 의요, 인간의 한계 내에서 행위로 의롭게 살아온 종교적 삶이다. 이렇게 하나님이 의인으로 인정하는 욥의 실상이 이럴진대 우리는 과연 어떤가? 참담하기까지 한 끔찍한 죄인들 아닌가? 그러면서도 우리는 조그만 죄 앞에서도 형제를 판단하고 정죄한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가 의롭지 못하고 죄를 짓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의로울 수 있는, 죄를 짓지 않을 능력이 없어서다.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다. 행위적 의에 머물러 있으면서 그것을 의의 기준으로 삼았던 욥은 하나님의 전능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게 된다.
이제 여호와는 욥 앞에 나타나서 한참을 연설하시면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나열하신다. 감히 욥이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만큼 자세하고도 치밀하게 자신의 전능하심을 과시하신다. 인과응보를 넘어서는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 앞에 욥은 할 말을 잃는다. 그때 비로소 욥은 깨닫는다.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어리석은 말을 하였는지. 그래서 그 유명한 욥의 고백이 나온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욥 42:5,6)
욥이 회개한 건 자기 의에 취해 자신의 실존, 인간의 한계를 몰랐던 무지다. 자신의 종교적 의를 기준으로 하나님의 처사를 판단하려 했으니 무지해도 한참 무지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욥의 세 친구들이 잘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욥의 말과 같이 정당하지 못하다. 죄 없는 욥이 죄 때문에 고난 받는다고 비난했기 때문이다. 욥은 다만 자신의 종교적 의를 포기하고 하나님을 실제로 믿게 되었으며 분별없는 마음이 지혜를 얻었다.
사실 욥기는 단계적으로 봐야한다. 욥의 율법적 의가 드러나는 1/2장, 욥의 분한과 원망이 자유롭게 분출되는 3장부터 31장, 그리고 엘리후의 꾸지람과 여호와의 설교로 욥이 자신의 무지를 회개하고 성숙해지는 32장부터 42장. 이렇게 세 단계를 거쳐 욥의 신앙은 성숙해진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고난을 당하면 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그런가?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런 고난을 주시나? 이렇게 종교적으로 생각할 게 아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항상 우리의 신앙에 있다. 고난은 비록 달갑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이 내 신앙을 업그레이드 시키시려고 주시는 가장 좋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는 우리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라 성육신한 신인메시아인 예수님에게도 마찬가지다.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한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히 5:8,9a)
우리의 무지는 항상 고난 앞에서 원망과 불평을 늘어뜨리며 하나님의 이유와 목적을 간과하는 데 있다. 비록 고난 앞에서 감사하다는 기도가 나온다 하더라도 그 기도가 실제가 되는 데에는 인고의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의 관념적 신앙이 실제가 되는 데에는 욥의 인내가 필요하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귀로 듣기만 하던 주를 눈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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