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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한 의문

솔로몬이 정말 잠언, 전도서, 아가를 썼을까?

성경 66권 가운데에는 저자를 알 수 없는 책들도 있지만 저자를 확실하게 밝힌 책들도 있다. 하지만 신학자들은 저자를 밝혀놓은 책들도 성경대로 믿지 않고 역사적 언어적 방법을 동원해서 원래 저자를 알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고대 문헌일수록 유명한 사람의 이름을 사용해 저술을 하는 경우가 많다며 성경에서 말하는 저자가 실제 저자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 솔로몬이 썼다고 알려진 잠언, 전도서, 아가는 대표적으로 저자를 알 수 없는 문서라는 게 신학자들의 주장이다.
 
실제로 잠언의 경우 25장 1절에 “이것도 솔로몬의 잠언이요 유다 왕 히스기야의 신하들이 편집한 것이니라”고 기록돼 있어 솔로몬 사후 히스기야 시대에나 가서 잠언이 편집된 사실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잠언과 전도서는 그 내용이 상이한 경우가 많아 이것들을 동일 저자의 작품으로 볼 수 있는지 의심이 들기도 한다. 잠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잠 1:7)’이라고 말하는 데 반해 전도서에서는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전 1:18)’고 하면서 결이 다른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아가는 적나라한 연애시가(戀愛詩歌)로서 성경에 포함시키는 게 맞나 할 정도로 정경성을 의심받았던 문헌이다.
 
그렇다면 솔로몬이 잠언과 전도서, 아가를 썼다는 근거를 어디서 찾을 수 있겠는가? 먼저 각 권의 첫머리에 저자를 밝혀놓았단 점을 들겠다.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잠 1: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 1:1)
 
솔로몬의 아가라 (아 1:1)
 
이렇듯 잠언, 전도서, 아가는 각 권의 저자가 솔로몬이라는 점을 누가 봐도 알 수 있게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기존 지혜서를 해설한 신학서적을 보면 각 권의 저자를 밝힌 1장 1절을 간과하면서 저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용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읽을 수 있다. 이는 우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는다는 객관적인 증거다. 게다가 각 권의 1장 1절은 서론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기존의 해설서들이 잠언이나 전도서, 아가의 내용을 실제로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 잠언, 전도서, 아가가 밝히는 저자의 칭호가 각각 다르다는 점도 눈에 띈다. 잠언에는 솔로몬을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라고 했고, 전도서는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라 불렀으며, 아가는 ‘솔로몬’이라는 이름만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각 권에서 말하는 지혜의 내용과 성격을 분별할 수 있다.
 
먼저 솔로몬을 다윗의 아들이라 칭하는데, 이는 객관적 사실이기도 하지만 솔로몬의 출생을 떠올리게 한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던 다윗은 딱 한번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하고 우리아를 교살하는 엄청난 죄를 범한다. 이는 다윗의 집안에 끔찍한 재앙을 불러와 자신의 아들 압살롬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솔로몬은 다윗을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한다. 다시 말해 솔로몬은 태생부터가 왕권을 잡고 이어나가기에 취약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꿈에 하나님이 나타났을 때 그는 무엇보다 백성을 다스릴 수 있게 선악을 분별하는 지혜를 구했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전무후무한 지혜를 얻게 된다. 그 결과가 우리가 읽는 잠언에 기록된 숱한 말씀들이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이해하기 쉽다. 잠언을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전래된 속담으로 보기도 하지만 ‘솔로몬의 잠언이라’는 10장 1절의 기록과 같이 잠언의 저자를 솔로몬으로 보는 데에는 크게 어려움이 없다. 하지만 전도서로 가면 저자와 관련된 문제가 복잡해진다. 우선 신학자들 가운데 전도서의 저자를 솔로몬으로 보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다들 전도서의 내용을 볼 때 그 저작시기를 이스라엘왕국 시대가 아니라 헬라식민지 시대로까지 올려보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전도서 1장 1절을 잠언 1장 1절과 비교하면서 그 저자를 고찰해야 한다.
 
전도서는 그 저자를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라 밝힌다. 다윗의 아들이란 칭호는 같지만 이스라엘 왕이 예루살렘 왕으로, 솔로몬이 전도자로 바뀌었다. 국가 전체를 가리키는 이스라엘이라는 지명이 예루살렘이라는 도시를 가리키는 지명으로 바뀐 이유는 뭘까? 이것이 나이가 들어 기력이 쇠약해진 솔로몬의 영향력을 지역의 축소로 나타내는 상징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구약에서 예루살렘이 인간의 중심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솔로몬이 자신의 심령을 고민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점을 나타낸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전도서의 내용이 할 것 다 해보고 누릴 것 다 누려본 자만이 할 수 있는 탄식이라는 데서 솔로몬 노년의 저작이란 추측이 가능할 뿐이다. 게다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전도자(傳道者)라는 객관적인 호칭을 쓴 데에서도 노년의 삶을 관조하겠다는 그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그렇다면 아가는 솔로몬의 생애 중 언제 쓰였을까? 일반적으로 솔로몬이 젊었던 시절 술람미 여인과 사랑에 빠져 넘쳐나는 시상으로 쓴 노래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상식적으로 아가는 잠언 앞에 놓여 솔로몬의 첫 저작이라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하지만 성경의 배열은 잠언, 전도서, 아가 순이다. 물론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헬라어 구약 칠십인역의 순서를 따르고 있고, 유대인은 아가를 다섯 두루마리라고 하여 잠언, 전도서와 별도의 장르로 다루고 있다. 하지만 칠십인역을 만들 때 솔로몬의 저작들을 모으면서 지금의 순서로 배열한 데에는 나름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는 혹시 아가가 솔로몬의 저작 중 마지막 작품이란 말이 되지는 않을까?
 
일천번제 후 백성을 다스리는 지혜를 구한 젊은 날의 솔로몬, 할 일 다 하고 누릴 것 다 누린 후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는 탄식을 뱉는 노년의 솔로몬, 죽음을 앞두고 다윗의 아들이니, 이스라엘 왕이니 예루살렘 왕이니 하는 계급장 다 떼고 자연인으로 돌아간 솔로몬. 그래서 아가는 일체의 가식 없이 철저하게 노골적이다. 게다가 상대는 이방인 여자, 술람미 여인이다. 사람이 가장 솔직해지는 순간이 임종을 앞두고서라면 솔로몬은 죽을 때가 되어서야 다윗의 아들이라는, 왕이라는 옷을 벗고 하나님 앞에 가장 솔직해질 수 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잠언, 전도서, 아가는 다 솔로몬의 저작이다. 더욱이 솔로몬의 생애가 그대로 반영돼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게 만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